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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과학 (청동주조·주종장인·음률)

오란65 2026. 7. 20. 20:21

목차


    성당의 종소리가 유독 맑고 웅장하게 들린다면, 그 뒤에는 정교하게 계산된 합금 비율과 조율 기술이 숨어 있습니다. 이 글은 지금도 실제로 울리고 있는 독일의 한 종을 통해, 중세 주종 기술이 얼마나 정밀했는지를 살펴봅니다.

     

    중세성당의 종

    종의 과학, 청동 속에 숨은 비율

    성당 종은 대부분 종금속(Bell Metal)이라는 특수한 청동으로 만들어집니다. 종금속이란 구리 약 78퍼센트에 주석 약 22퍼센트를 섞은 합금으로, 이 비율에서 벗어나면 소리가 탁해지거나 종이 쉽게 깨집니다. 주석이 많으면 소리는 맑아지지만 종 자체가 잘 부서지고, 적으면 단단하지만 소리가 둔탁해지는 식입니다.

    종을 만드는 과정은 왁스원형주조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밀랍으로 종의 형태를 실물 크기로 빚은 뒤 그 위에 점토를 발라 틀을 만들고, 가열해 밀랍을 녹여 빼낸 빈 공간에 녹인 청동을 부어 넣는 방식입니다. 밀랍 모형 하나로 종 하나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대형 종 하나를 주조하는 데는 몇 달에서 길게는 1년 가까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주조 작업 자체도 큰 위험이 따랐습니다. 녹인 청동은 섭씨 1,000도가 넘는 온도로 다뤄야 했고, 틀에 미세한 균열이라도 있으면 쇳물이 새어 나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형 종 주조는 도시 전체가 지켜보는 행사이자, 동시에 실패하면 막대한 손실로 이어지는 위험한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글로리오사, 세계 최대의 중세 종

    이 기술이 정점에 이른 사례가 독일 에르푸르트 대성당의 종, 글로리오사(Gloriosa)입니다. 1497년 7월 8일, 주종 장인 게르하르트 판 보우가 주조한 이 종은 무게 11.45톤, 높이 247센티미터, 지름 257센티미터에 이르며, 지금까지 만들어진 중세 자유 진동식 종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큰 종으로 꼽힙니다(출처: 요다위키).

    주조한 지 500년이 넘었지만 이 종은 지금도 실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만 균열이 생겨 1985년 용접으로 보수했고, 2004년에는 새로 생긴 균열 문제로 다시 손을 봐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기적으로 타종되며, 원래의 음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이 종을 만든 게르하르트 판 보우는 네덜란드 캄펀 출신의 주종장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럽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며 대형 종을 주조했는데, 이는 당시 주종 기술이 특정 도시 하나에 갇혀 있지 않고 장인의 이동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음을 보여 줍니다.

    저의 군대시절 통신병과 보직으로 복무시 통신훈련을 나갔을 때 특정 주파수 대역을 정확히 맞추지 못하면 신호 전체가 왜곡된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종을 만들 때 합금 비율 1~2퍼센트 차이로 음색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도 비슷한 원리로 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밀한 비율 하나가 결과물의 완성도를 통째로 좌우한다는 점에서, 옛 주종 장인의 작업과 제가 다루던 통신 장비 조율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입니다.

     

    주종장인의 음률 조율 기술

    종이 완성됐다고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종장인들은 종을 두드려 원하는 타종음이 나오는지 확인했습니다. 타종음이란 종을 쳤을 때 가장 크고 뚜렷하게 들리는 기본음을 뜻하며, 글로리오사는 '미(e)' 음을 내도록 설계됐습니다.

    좋은 종은 기본음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 배음이 함께 어우러져야 했습니다. 배음이란 기본음과 함께 울리는 부수적인 음들을 뜻하는데, 잘 조율된 종은 기본음보다 한 옥타브 낮은 웅웅거리는 저음과 함께, 단3도·완전5도·옥타브 음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됩니다. 이 균형이 흐트러지면 아무리 크게 울려도 소리가 거칠게 들립니다.

    이런 조율은 순전히 장인의 귀와 경험에 의존했습니다. 정밀한 측정 도구가 없던 시절, 두드려 본 소리만으로 청동 두께를 깎아 나가며 원하는 음을 맞췄다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놀라운 수준의 숙련도입니다.

    이제까지의 제 사회생활을 통하여 얻은 결론으로 결국 좋은 결과물은 매뉴얼만으로는 완성되지 않고 오랜 경험이 쌓인 감각이 더해져야 한다는 것을 자주 느낍니다. 글로리오사를 만든 장인의 귀도, 수십 년간 청동과 소리를 다뤄 온 경험이 아니었다면 갖추기 어려웠을 감각이었을 겁니다.

    500년이 넘은 종소리가 지금도 원래의 음을 그대로 들려준다는 사실은, 그 시절 장인의 기술이 얼마나 정밀했는지를 매일 증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측정기 하나 없이 오직 귀와 손끝의 감각만으로 청동의 두께를 깎아 음을 맞췄던 그 시절의 방식은, 지금의 정밀 계측 장비로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일지도 모릅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오랜 시간 쌓인 장인의 감각을 완전히 대체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 본 글은 역사 자료와 위키백과 등 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일부 도입부는 이해를 돕기 위해 재구성하였습니다.